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10.1 사건 (문단 편집) ==== [[미군정]]의 무능과 전국적인 기아 사태 ==== ||<-4>(1)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 '''1위''' || '''기권''' || '''4686명''' || '''98%''' || || 2위 || 위생 시설 || 96명 || 2% || ||<-4>(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 1위 || 식량 정책 || 2534명 || 53% || || 2위 || 산업 운영과 주택 관리 || 1482명 || 31% || ||<-4>{{{-2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종로, 본정 입구, 노량진에서 통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35939054&referrerCode=0&searchKeyword=%EA%B8%B0%EA%B6%8C|출처]]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ykeufM.jpg]]}}} || || 1946년 7월 2일자, 경북 지역신문인 [[영남일보]]. 기사 가운데 '''배곱파 못살겟소'''가 보인다. 당시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사이다. || 한편 [[미군정|이 시기]] 민중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식량 문제였다.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남한 민중들은 배를 곯았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은 1945년 9월 '미곡 자유화 정책'을 발표한다. 이전까지는 일제강점기의 쌀 공출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쌀을 자유롭게 사고팔지 못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시장이 개방되면서 쌀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의 식량시장은 만성적인 물류문제[* 특히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그나마 일제가 만들어놓은 물류시스템마저 대부분 마비됐다는 것이다.]와 공급부족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공급이 모자른 상태에서 갑자기 자유시장이 되었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매점매석]]하여 쌀 가격이 폭등하였다. 이로 인해 쌀값이 30배 넘게 오르게 된다. 요즘으로 치면, 쌀 10kg에 약 3만원 하던 것이 갑자기 쌀 10kg에 90만원이 된 셈. 어마어마한 물가 상승이다. 특히 한국인은 밥심으로 일한다 할만큼 쌀 소비량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나라임을 생각한다면, 당시 소비자들이 실질적으로 느끼는 물가상승률은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미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5개월 만인 1946년 1월 다시 일제강점기 때의 공출과 똑같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한다. 심지어 일제도 하지 않은 여름 보리 공출[* 보리 공출이 뭐 그렇게 대수냐 할 수 있는데, 이 초여름 보리로 사람들은 가을 추수 전까지 버텨야 한다. 즉 이 보리마저 없으면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다. 흔히들 아는 [[보릿고개]] 역시도 전년도 가을에 수확한 쌀이 떨어져서 보리를 수확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의미한다. 즉 보릿고개는 사실상 보리 수확을 바라보며 견디는 건데 그 보리마저 없으면 가을 수확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 기간만 몇 달인지라 보리까지 거둬간다는 건 그냥 굶어죽으란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까지 한다. 변덕스런 정책 변경에 사람들은 공출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미군정은 공출 목표량 550만 석 중 불과 12.4%만 수집하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청송 지역에서는 200명이 집단으로 굶어 죽었다. 이런 과정은 [[반지성주의|'''미군정 당국의 행정 능력이 매우 무능했다''']]는 걸 보여준다. 실제로 한 미군정 관료는 식량 정책이 실패했음에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쌀이 없으면 '채소나 과실(과일)'을 구해 먹으면 되지 않냐]]'''는 [[망언]]을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91900209202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9-19&officeId=00020&pageNo=2&printNo=7085&publishType=00020|#]][* 이 모든 원인은 미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의 무능에 있다. 거기다가 하지 자신도 조금 운이 없어서 앉혀진 사람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하지의 무능이 워낙 상상 이상이라 국내의 우익 인사들조차 하지를 영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능하지만 좋은 사람이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한국인들 입장에선 어그로가 끌릴 소리나 잔뜩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